하디 선교사 도내 처음으로 지경터교회 세워
강원도에서 처음으로 철원에 교회를 세운 캐나다 토론토 의사 출신 하디 선교사, 지경터교회, 김화읍 새술막교회(학사리), 김화교회(읍내리) 설립, 1903년 원산대부흥운동’ 주역
[출처] 前 강원도민일보 편집국장 조규병
하디 선교사 도내 처음으로 지경터교회 세워
하디 선교사는 철원군에 지경터교회 새술막교회 김화교회를 세워 도내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가 전파되도록 했다.
필자가 철원군으로 임지를 옮겨와 제일 먼저 들었던 것이 3.1 만세운동이 도내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곳이 철원이고, 또 교회가 가장 먼저 세워진 곳도 철원이라는 사실이었다. 향토사학자 김영배(金瑛培) 선생은 철원군에 처음 부임해온 필자가 기독교 교인이라는 것을 알자 캐나다 출신 하디 선교사가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지경리에 교회를 세웠고, 이어 강원도 곳곳에도 교회를 세웠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1884년 4월 5일, 벽안의 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제물포 항에 내림으로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가 시작된다. 130년이 지난 지금은 기독교가 우리나라의 근대화와 산업화에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해 온 것을 누구나 부인 할 수 없지만, 당시만 해도 천주교인들이 당한 쓰라니 상처가 남아 있고 더구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지나친 내정 간섭으로 온 나라가 불안에 떨던 때라서 사실상 외국 선교사들의 활동에는 많은 제약이 따르던 때였다. 감리교회와 장로교회를 대표하는 이들은 가난과 무지로 얼룩진 조선의 사회적 변화를 위해 의료와 교육 사업에 주력하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했다. 이러는 가운데 캐나다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자원하는 로버트 알렉산더 하디 선교사(당시 25세)가 1890년 9월 가족과 함께 조선 땅에 들어온다.
그는 대학 재학 중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 목사의 영향은 받고 선교사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캐나다 선교회 소속인 하디 선교사는 처음에는 조선정부가 서양식 병원으로 설립한 제중원에서 2년 동안 근무하고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위하여 원산으로 거처를 옮긴다. 하디 선교사는 원산에서 남산동감리교회를 손수 개척하고 8년 동안 병원 일과 하나님 일을 병행하다가 1898년 소속을 미국 남감리회 선교회로 옮기며 원산과 강원지역 전체의 사역 책임을 맡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울을 비롯한 부산 평양 인천 개성 원산 등 대도시에는 교회가 세워지고 활발한 움직임이 있었지만 교통 오지인 강원도에는 단 한 곳도 교회가 세워진 곳이 없었다. 특히 원산에는 외국인 선교사가 하디 선교사를 비롯해 7명이나 있었다. 1900년도에 접어들어 하디 선교사는 강원도에 교회를 세우기로 작정하고, 원산과 서울의 길목인 철원을 첫 대상지로 삼았다.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 하나님 말씀으로 위로 받아
눈이 조금씩 녹기 시작하자 하디 선교사는 철원에 대하여 평소 잘 알고 있는 윤승근 선생을 데리고 철원 지경터에 내려와 한옥을 얻어 먼저 진료소부터 열었다. 윤 선생이 마을마다 다니며 “서양의 유명한 의사가 돈을 받지 않고 환자를 치료한다”는 소문을 내자 금방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디 선교사의 정성어린 진료는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고맙게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윤 씨는 ‘오는 일요일, 교회에 오라’고 귀띔했다.
첫 일요일 아침, 3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였다. 한국말이 유창한 하디 선교사는 한국 사람들의 고달픈 삶을 깊이 이해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한국 사람의 가난과 굶주림 헐벗음에 대한 서양인의 이해가 통했는지 교인들의 숫자는 계속해 늘어갔다.
하디 선교사는 지경터교회가 틀이 잡히자 이곳에서 4km쯤 떨어진 김화 지역에 새술막교회(김화읍 학사리)와 이어 김화교회(김화읍 읍내리)를 세웠다. 이 교회들 역시 금방 교인들이 늘어났다. 이들 교회를 윤 선생(당시 권서라는 직분)에게 모두 맡기고 하디 선교사는 전도 여행을 떠난다.
하디 선교사는 1901년 한 해 동안 무려 5번이나 강원도 동해지방을 순회하며 교회를 개척하는데 이때 개척한 교회가 고성교회 간성교회 양양교회 강릉중앙교회 등 4개 교회인데 지금은 모두다 감리교회의 대형 교회로 성장해 지역 사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교회 개척 사업이 마무리 되자 하디 선교사는 원산에 와 있는 외국이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성령 운동을 시작한다.
하디 선교사 1903년 원산대부흥운동 주도
지금까지 자기의 지식과 경험에 의지해 말씀을 전하던 선교사들이 성령 체험이라는 새로운 도전과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회개운동을 시작하며 한국 기독교 제2기 역사가 하디 선교사에 의하여 다시 쓰여 진다.
1903년 8월 하디 선교사는 매년 열리는 외국인 선교사 연합 기도회를 준비하다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않은, 뜨겁게 눈물을 흘리며 자기 죄를 회개하는 성령체험을 하게 된다. 하디 선교사로 인해 연합 기도회에 참석했던 외국인 선교사 모두가 성령체험을 하게 되고, 각자 돌아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역사를 만들어 나갔다. 이때 일어난 선교사들의 성령체험을 감리교회에서는 ‘1903년 원산대부흥운동’이라 부르고 있다.
뜨거운 성령 체험을 한 하디 선교사는 그 후부터는 원산 철원 개성 서울 인천 평양 부산 등 대도시에서 부흥회를 계속해 인도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기독교 신자로 만들었다. 특히 서울에서는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학생들이 부흥회마다 참석해 성령체험을 했다.
그 후 하디 선교사는 서울수포교교회 담임 목사로 임지를 옮기고 협성신학교 교장, 피어선성경학원 원장, 조선선교사연합회 회장 등으로 한국 기독교 정착에 힘쓰다 1935년 정년을 맞아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갔다.